대화기록
조금 더 책을 감정이 아니라 전달 내용에 근거하여 읽을 필요가 있음.
난 해당 책 내용을 통해 하나의 진리를 찾고 싶었다.
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1장 신경성 폭력
작가는 현대 사회를 휩쓸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병변이 정신병임을 짚는다. 이는 항원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다.
왜 스스로에게 원인이 '생기고 잇는지'를 조사한 결과는 '긍정성의 과잉' 때문이라고 작가는 얘기한다.
긍정성이란 뭘까. 지금까지 우리는 타자의 부정성(타자가 우리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면역학적 반응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시대를 지났다.
2장에서 작가는 긍정성을 정말 '긍정'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규율(당위)을 통해 부정하던 것에서 능력을 긍정하는 것으로 하나의 개체를 '긍정'해주었단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일반화되었다.
작가는 현대 사회가 타자를 배제하는 식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모든 타자를 자아화하고, 그 장벽을 허물면서 세계화되고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와 다른 이방인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고, 적어도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있을, 우리에겐 일종의 강제 행위였다.
그는 역사가 증명한다. 단순한 이민자부터, 외노자 나아가 과거의 개화시기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때 당시에 우리나라는 면역학적 사회였지만, 면역학적으로 외부의 요소를 조금씩이나마 받아들이면서 외부자를 내재화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조금씩 세계와 동화되었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와 확실히 다른 존재들에게도 동질성을 느껴야할 필요성이 생겼다.(pc, 인종 등)
그렇게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시스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굴레를 만든 것이다.
스스로가 어떠한 존재인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소속감을 느끼기에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즉, 나 개인의 생존이 목적이 된 것이다.(31페이지 마지막줄)
이는 즉, 우리는 우리 모두를 긍정한다고 하지만, 나 이외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부정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 이는 가족이라는 최소단위를 굉장히 소중히 하는 사회현상에서 알 수 있다. 한국은 예전에 부모가 없으면 다른 가족이 데려다가 키우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미시적으로 보면 부정성은 증가하였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확실히 우리는 우리들을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즉, 속이 곪아있는 것이다.
2장 규율사회의 피안(불교에서의 천국)에서
긍정성의 포화에서 우리는 서로들을 모두 하나의 객체로 인정하게 되었고, 세상 모두가 각각 한 명씩 진리를 갖게 되었다. 세계가 하나가 됨으로써 해당 진리들은 모순을 일으켰고, 사회는 그를 책임져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개인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을 취한 것이 성과사회이다. 스스로 책임을 져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 그게 마땅하다고 느끼는, 효율성을 스스로에게 내제하게 되었다.
우울증 -> 개인의 문제 vs 시스템의 문제?
이사람은 우울증은 말하자면, 길을 잃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 이는 개인의 문제. 권위적 강제가 있었는데 없어지니까.
부사관에 지원해서 40대 중반에 군대를 제대한 남자 정도로 생각할 수 잇을듯.
3장 깊은 심심함
나아가 이러한 상황이 심화되면서 우리는 세계화가 된다는 틀에만 머무를 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각 개인으로서 경쟁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과거로의 회귀. 멀티태스킹의 시작이다. 우리는 A도 B도 C도 잘해야 살아남는, 하나의 개체, 하나의 인적자원에게 영MZ함으로 요구하게된 것이다.
수많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을 통해 알 수 있는 긍정성의 과다현상은 필연적인 멀티태스킹이 필요했으며, 이미 인간이 할 수 있는 멀티태스킹 능력을 뛰어넘었다. 그 결과가 컴퓨터이자, AI이다. 인간이 하기에 오래 걸리는 것을 기계가 대신한다. 처음엔 이는 효율화였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드디어 사색을 할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기계와 경쟁을 해야한다.
사색을 하면 걷는다는 행위가 심심함의 원인이었음을 인식해볼 수 있다. 하지만 사색하지 않으면 금방 포기해버린다. 현대사회의 대부분이 그렇다. 과잉된 정보에 적응한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과잉된 정보에 완전히 적응하여, 깊이는 없어도 넓이가 엄청나게 큰 게 내 다음 세대(2100년)가 살아가는 방식이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사색을 할 수 없어졌고 사회는 점점 성과에 더욱 매몰될 것이다.
아니면 오히려 그 누구도 성과를 낼 수 없는 사회가 될지도. 그럼 어떻게 될까?
- 작가가 제시하는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하나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했음.
- 지금 결국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결국 짐승의 삶을 살고 있다.
- 결국 멈춰서라. 멈춰설 수 잇는 힘을 가져라.
-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
4장 활동적 삶
나는 한나 아렌트의 '영웅적 행동'이 현 사회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이러한 사상이 맞다고 생각은 해도 마냥 긍정적인 기분은 안 든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게 정의로운진 모르겠기 때문이다. 영웅적이라는 건 그만큼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재능은 무한하게 시간을 때려 넣을 수 있느냐의 척도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너무 좋아해서 어릴때부터 축구만 하다가 국가대표가 된 사람도 있고, 20살때부터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만 하다가 인생을 망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것의 차이는 압도적인 '시간'의 차이다.
그렇다면 내가 늦게 쏟아넣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경쟁에서 밀려야하는가? 현 사회에선 그게 맞다.
실제로 인간의 탄생과 그 가능성은 경이로운 게 맞다. 나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경이로움을 못느끼는 게 최대 문제점이다.
사실 우리는 개인의 평가 척도로 성과를 요구하는, 즉, 개인의 척도에 있어서는 성과가 최고지만, 결국 사회의 형태는 여전히 노동사회인 것 아닐까? 대체 우리가 하는 노동에 자유가 어디에 있지?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없으면 죽어야한다.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한다. 여기에 자유가 어디있지? 내 눈엔 돈이라는 규율만이 보이는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하고 돈을 버는 행위'가 개인에게는 성과를 준다는 일종의 회유책이자 당위성으로 여겨지지만, 사회의 입장에서는 결국 톱니바퀴. 우리 사회는 자유로워보이지만 규율이 역시 ''근본적으로''잠재되어있는 일종의 규율사회일지도 모른다.
난 아렌트의 논리에 한 치의 오류도 느끼지 못하였다. 개인의 자아가 강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사회가 이미 성과, 행동사회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아렌트의 논리에서는 오류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개인의 자아가 강해졌다고 해서, 현재 세상이 '모두가 자아가 뚜렷한 사회'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일반화된 삶을 살고 있다. 인스타를 하고, 누군가가 잘되는 걸 보면서 한탄하고, 누군가가 안 되는 걸 보면서 비웃는다. 모두가 그렇게 되고 있다. 여기에 대체 자아가 어디있나?
작가는 4장에서 확실하게 '우리는 노동하는 동물은 아니다' '우리가 유적화(보편화) 되었다면 대체 일반적인 동물에서 보이는 느긋함은 왜 안보이는가?' 라고 말하며, 우리는 동물과 다르게 느긋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신경적으로 날이 서있기에 단순히 노동하는 동물로서 포장하는 것은 틀렸다고 서술한다.
난 잘 모르겠다? 진짜 난 잘 모르겠다. 날이 서 있는 부류가 있지만, 날이 다 닳아서 무뎌져버린. 신경학적으로 병에 걸려버린 사람들은, 죽기를 체념해버린 동물처럼 느긋해보인다.
5장 보는 법의 교육
들어오는 정보에 대해서 확실하게 부정을 할 수 있어야한다. 이는 즉 나에게 들어온 정보에 대한 의심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의심을 하고,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하고, 사색을 하여 스스로 결정하라.
6장 바틀비의 경우
바틀비는 노동사회에 살고 있었음에도 탈진하여있었다. 주 내용은 아렌트에 대한 비판이다.
7장 피로사회
결국 우리는 짜증과 같은 자아-피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쌓인 피로감을, 다른 존재들과 함께 나누면서 공유하고, 그 과정에서 유대를 쌓아라는 식의 마무리를 한다.
내 느낌으로는 결국 우리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음을 함께 공유하면서 풀어나가자는 식의 희망찬 결론이다.
8장 우울사회